시마즈 도시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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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도시히사는 1537년에 태어난 시마즈 다카히사의 아들로, 뛰어난 지략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1554년 이와쓰루기 성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며 시마즈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고, 요시다 성의 성주를 맡아 지역 통치에도 힘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당시 항전을 주장했으나, 가신들의 반란 연루로 인해 자결했다. 그의 유해는 교토와 가고시마에 묻혔으며, 사후에는 '전투의 신'과 '안산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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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도시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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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시마즈 도시히사 |
본명 | 시마즈 도시키히사 (島津歳久) |
출생일 | 1537년 8월 15일 |
사망일 | 1592년 8월 25일 |
출생지 | 이사쿠 성 |
사망 장소 | 류가미즈, 가고시마 |
이명 | 또로쿠로 (又六郎) 게도인 (祁答院) 곤고 (金吾) |
법명 | 세이사이 (晴蓑) |
신호 | 벽공암악언명 (碧空巌岳彦命)『島津歳久の自害(増補改訂版)』島津修久著 島津顕彰会、2000年10月 |
계명 | 심악양공대선백 (心岳良空大禅伯) |
묘소 | 조후쿠지 소젠지 후쿠쇼지 심악사 (헤이마쓰 신사) |
가문 정보 | |
가문 | 시마즈 씨 |
아버지 | 시마즈 다카히사 |
어머니 | 셋소 부인 (이리키인 시게사토의 딸) |
형제 |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 도시히사 시마즈 이에히사 |
배우자 | 고지마 쓰나아키의 딸 (에쓰소 부인) 니이로 다다카타의 딸 (바이 부인) |
자녀 | 유노오 (렌슈 부인, 시마즈 다다치카의 부인, 이리키인 시게토키의 부인) 하나야 부인 (기타고 미쓰히사의 부인, 이주인 히사히로의 부인) |
사위 | 다다치카 |
경력 | |
소속 | 시마즈 씨 |
지위 | 좌위문독 |
주요 전투 | 다카바루 공성전 (1576년) 미미가와 전투 (1578년) 미나마타 공성전 (1581년) 이와야 성 공성전 (1585년) 규슈 정벌 (1587년) |
섬긴 주군 | 시마즈 다카히사 요시히사 |
2. 생애
시마즈 도시히사는 시마즈 다카히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지략으로 할아버지 시마즈 다다요시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2] 그는 아버지와 형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를 도와 1554년 이와쓰루기 성 전투[2]를 시작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시마즈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이후 요시다 성[3]과 토라이 성의 성주를 역임하며 영지를 다스리고 가문의 규슈 통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시작되자, 도시히사는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와 대응 방식을 두고 가문 내 다른 인물들과 입장을 달리하기도 했다.[9][3] 형들이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으며, 히데요시 암살을 시도하는 등 극렬한 반감을 드러냈다.
1592년 임진왜란에는 병(중풍)을 이유로 참전하지 않았으나,[10][4][5][6] 평소 히데요시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와 더불어[10] 가신들이 우메키타 잇키에 연루되면서[10] 히데요시의 강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형 요시히사로부터 토벌 대상이 되자, 시마즈 가문의 안위를 위해 1592년 음력 7월 18일 자결을 택했다.[10] 그의 비극적인 최후와 히데요시에 대한 저항 정신은 후대 사쓰마번 무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10]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정신적 귀감이 되었다.[10] 사후 그의 후손들은 히키 시마즈 가를 이루었다.
2. 1. 초기 활동과 가문의 성장 (1537년 ~ 1577년)
할아버지 시마즈 다다요시로부터 "자초지종을 따져 이해를 헤아리는 데 있어는 견줄 자가 없다"[2]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지략이 뛰어났다. 그는 아버지 시마즈 다카히사와 형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를 도와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며 시마즈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덴분 23년(1554년) 17세의 나이로 오스미국의 이와쓰루기 성(岩剣城) 전투에 형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첫 출진하였다. 이 전투는 겟도인 요시시게(祁答院良重일본어)를 상대로 한 격전이었으나, 시마즈군은 이와쓰루기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년 뒤 오스미 가모키타무라(蒲生北村) 성 전투에서는 시마즈군이 패배했고, 도시히사는 적진에 고립되어 중상을 입기도 했으나 탈출에 성공했다.
에이로쿠 5년(1562년), 이토 요시스케에게 영지를 빼앗긴 키타하라 씨(北原氏)의 재흥을 돕는 과정에서, 이에 저항하는 키타하라 옛 가신 기타하라 가네마사(北原兼正일본어) 토벌군의 총대장을 맡아 요코카와 성(横川城)을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에이로쿠 6년(1563년)부터는 요시다 성 성주로 임명되어 약 18년간 현재의 가고시마시 요시다(吉田) 지역 일대를 다스렸다.
이 시기 시마즈 가문은 겟도인 요시시게 사후 세력이 약화된 겟도인 씨와 이리키인 씨(入来院氏), 토고 씨(東郷氏) 등 시부야 씨(渋谷氏) 일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겐키 원년(1570년), 시부야 일족이 시마즈 가문에 귀순하면서 오랜 숙적이었던 이들의 거점인 겟도인(祁答院) 지방(현재의 사츠마초 대부분과 사츠마센다이시 일부)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덴쇼 3년(1575년), 동생 시마즈 이에히사에 이어 교토로 상경했다. 표면적으로는 가도(歌道) 전수를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목적은 중앙 정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당시 세력을 확장하던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덴쇼 5년(1577년), 시마즈 가문의 공세로 휴가국의 이토 요시스케가 분고국으로 물러나자, 그의 일족 여성이었던 우메(梅)를 측실로 맞이했다.
2. 2. 규슈 통일 전쟁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1577년 ~ 1592년)
덴쇼 5년(1577년), 휴가의 이토 요시스케가 시마즈 세력의 공세에 밀려 분고 국으로 퇴거하자, 도시히사는 이토 씨 일족의 딸인 우메(梅)를 거두어 측실로 삼았다. 그녀는 후에 이주인 히사히로(伊集院久治)의 아들을 낳았다.덴쇼 8년(1580년), 시마즈 가문이 평정한 겟도인 씨의 옛 영지인 겟도인 12향(현 사쓰마초 일대) 1만 8천 석을 추가로 받아 토라이 성에 입성하였다. 도시히사는 이곳을 12년간 다스렸으며, 그의 직속 군대는 '겟도인중'(祁答院衆) 또는 '미야노조중'(宮之城衆)이라 불렸다. 그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삼아 시마즈 가문의 규슈 통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을 시작하자, 시마즈 가문 내에서는 항전 여론이 강했다. 그러나 도시히사는 히데요시를 "농민 출신으로 맨몸으로 출세한 것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4형제 중 유일하게 히데요시와의 화의를 주장했다고 전해진다.[9] 하지만 이 주장은 가문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와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다.[9] 다른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가신들이 화친으로 기울었을 때 도시히사가 "화친에도 시기가 있으며, 지금 이대로 항복해서는 안 된다"며 항전을 주장했다고도 한다.[3]
형인 시마즈 요시히사와 시마즈 요시히로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이후에도 도시히사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센다이의 타이헤이지에서 오구치로 진영을 옮길 때, 도시히사는 자신의 영지인 야마자키(山崎)에서 가신 혼다 시로자에몬(本田五郎左衛門)을 시켜 히데요시 군을 험한 길로 유인하고 히데요시의 가마에 화살 여섯 발을 쏘게 했다. 히데요시는 미리 습격을 대비하여 가마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이는 간파쿠가 된 히데요시에게 보인 매우 드문 저항 행위였다.
규슈 정벌 전후로 보인 도시히사의 히데요시에 대한 모순된 태도(화의 주장과 극렬 저항)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정벌 과정에서 데릴사위 시마즈 다다치카를 잃은 것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는 설, 혹은 히데요시의 시마즈 가문에 대한 불만을 자신이 모두 떠안으려 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도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한편, 시마즈 가문의 총사령관이었던 형 요시히사는 도시히사를 중심으로 한 반(反) 히데요시파 가신들의 존재를 이용하여 전후 처리 협상에서 시마즈 가문에 유리한 조건(사쓰마, 오스미, 휴가 3국 영지 안도)을 이끌어내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2. 3. 우메키타 잇키와 자결 (1592년)
1592년,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도 병(중풍)을 핑계로 출진하지 않았다.[10][4][5][6] 이는 사실이었으나, 평소 히데요시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에[10] 히데요시는 요시히사, 요시히로, 이에히사에게는 영지를 주었으나 도시히사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는 시마즈 가문을 분열시키려는 히데요시의 의도로 해석되지만, 이후에도 시마즈 형제들은 맏형 요시히사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는 않았다.같은 해, 시마즈 가문의 가신 우메키타 구니카네(梅北国兼)가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든 우메키타 잇키에 도시히사의 가신 다수가 가담하면서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10] 결국 형 요시히사는 도시히사에게 토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도시히사는 자신의 병력 손실이 곧 사쓰마 시마즈 전체의 손실이라 생각하고, 첫 출진의 연고가 있는 이와쓰루 신사(岩푯神社)를 향해 가신 스물일곱 명과 함께 작은 배로 출항했다.
배의 속도가 느려 곧 추격군에게 따라잡힌 도시히사는 현재의 히라마쓰 신사 도리이 부근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할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병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자결조차 쉽지 않았고, 마치다 히사베(町田久倍)가 이끄는 추격군 역시 주군의 동생에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도시히사가 곁에 있던 돌을 칼 대신 삼으려 하며 "어서 목을 베라"고 재촉하자, 가신 하라다 진지(原田甚次)가 그의 목을 베었다.[10] 향년 56세였다. 도시히사가 최후를 맞이할 때, 그를 따르던 스물일곱 명의 가신들도 함께 순사했으며, 토벌군 병사들조차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형 요시히사에게 보내는 유서와 사세구(辞世の句)가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나는 병 때문에 다이코(太閤) 전하 앞에 나아가지 못했을 뿐, 양심에 거리낄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반을 의심받은 이상, 시마즈 가문의 안위를 위해 할복하려 한다. 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무사의 본분을 다하고자 부득이 교전하지만, 이는 형님께 활시위를 당기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나를 따르는 병사들에게는 죄가 없으니 남은 가족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10] 사세구는 "맑은 삿갓 빌려 쓰고 세상 티끌 벗어나니, 내 가는 곳 구름 위라네 晴蓑(せいさ) かりて 世の塵(ちり) を のかれけり 後の(のちの) 行方(ゆくえ) は 雲の 上(うえ) まで일본어"였다.

그의 목은 교토의 이치조 모도리바시에 효수되었으나, 후에 시마즈 타다나가가 몰래 거두어 교토 조후쿠지(浄福寺)에 안치했다. 유해는 조사(帖佐)의 소젠지(総禅寺)에 매장되었고, 영혼은 시마즈 가문의 역대 보리사인 후쿠쇼지(福昌寺)에서 제사를 지냈다.[10] 히데요시 사후, 도시히사가 최후를 맞이한 땅에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가쿠지(心岳寺)가 세워졌다.[7] 매년 음력 7월 18일에는 그의 유덕을 기리는 신가쿠지 참배(心岳寺詣り)가 행해진다.[10]
자결 당시 병으로 칼조차 쥘 수 없어 옆의 돌로 배를 가르려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여성도 출산 때 이런 고통을 겪겠지. 내 사후에는 이런 여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리라"고 말했다고 하여, 히라마쓰 신사에서는 그를 '''전투의 신'''(戦の神)뿐만 아니라 '''안산(安産)의 신'''으로도 모신다.[10]
옛 사쓰마번에서는 그의 삶을 고쥬 교육(郷中教育, 사쓰마 번 무사 자제 교육법)의 귀감으로 삼아 형 요시히로 이상으로 숭배했다. 특히 막부 말기, 안세이 대옥으로 긴코 만(錦江湾)에서 배를 타고 도주하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동승한 승려 겟쇼(月照)에게 도시히사의 최후를 이야기하며 각오를 다진 뒤, 신가쿠지 방향으로 합장하고 밤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일화는 당시 사쓰마 지사들에게 도시히사가 얼마나 큰 정신적 지주였는지 보여준다.[10]
도시히사 사후, 그의 사위이자 양자인 시마즈 타다치카(島津忠隣)의 적남 시마즈 쓰네히사(島津常久)가 뒤를 이었다. 그 후손들은 번정 시대 동안 히키(日置) 영지 9,000석을 다스렸기에 히키 시마즈 가(日置島津家)라 불렸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3. 인물과 평가
조부 시마즈 다다요시로부터 “자초지종을 따져 이해를 헤아리는 데 있어는 견줄 자가 없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후세 사쓰마 사람들로부터 뛰어난 지략가로 칭송받으며 숭앙되었다.
주로 형 요시히사의 곁에서 작전 참모 역할을 수행하며 시마즈 군의 전략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첫 출진인 이와쓰루기성(岩剣城) 전투를 시작으로 형 요시히로, 동생 이에히사와 함께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오스미 오바마성 공격(小浜城攻め), 이토씨 정벌,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 등에서 중요한 공적을 세웠다.
정치적으로는 1563년부터 요시다 성주를 맡았고, 이후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한 방어상 요충지를 다스리며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술을 마시지 못하는 형을 대신해 가신들의 술잔을 받는 등 가신단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당시, 가문 내 강경론이 우세한 가운데 히데요시를 “농민 출신으로 맨몸으로 출세한 것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유일하게 화의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 요시히사와 요시히로가 항복한 뒤에도 저항을 계속했으며, 히데요시가 진을 옮기는 도중 길 안내를 맡은 자신의 가신을 시켜 히데요시의 가마에 화살을 쏘게 하는 등 간파쿠(関白)가 된 히데요시에게 이례적으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모순된 행동의 배경에 대해서는 데릴사위 시마즈 다다치카의 죽음에 대한 원한설, 시마즈 가문에 대한 히데요시의 불만을 자신이 떠안으려 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1592년 임진왜란에는 병을 이유로 출진하지 않았으나[10], 같은 해 가신 우메키타 구니카네가 일으킨 반란(우메키타 잇키)에 도시히사의 가신 다수가 참여하면서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 결국 형 요시히사의 토벌 명령을 받아 책임을 지고 자결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향년 56세였다. 유서에는 자신은 결백하나 시마즈 가문의 안위를 위해 할복하며, 가신들의 저항은 형에게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삶과 죽음은 후대 사쓰마번에서 고쥬 교육(郷中教育)의 모범으로 여겨져 깊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막부 말기의 지사들에게 큰 정신적 영향을 미쳤다.
3. 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집안의 술자리에서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형 요시히사를 대신하여 가신들의 술잔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에는 중풍을 앓았으며, 자결할 때도 이 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 시마즈 가문 내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최종적으로는 가장 강경한 반 히데요시파 인물이 되었다.
- 자결할 당시, 중풍 때문에 칼을 제대로 쥘 수 없게 되자 곁에 있던 돌을 사용하여 할복을 시도하다가 큰 고통을 겪었다고 전해진다.[2] 이때 "여인들도 출산할 때 고통스러울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그런 여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말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를 모시는 히라마쓰 신사에서는 '전쟁의 신'뿐만 아니라 '안산(安産)의 신'으로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2] 이러한 연유로 '오이시 님'(お石様|오이시사마일본어)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 도시히사가 사망할 때까지 영유했던 게토인(祁答院) 영지는 이후 기타고 도키히사가 다스리게 되었고[8], 나아가 시마즈 타카히사의 셋째 아들인 나오히사의 아들 타다나가(미야노조 시마즈 가문)가 이를 이어받아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옛 게토인 영지(가고시마현 사쓰마정) 주민들 사이에서는 도시히사에 대한 애정이 깊으며, '시마즈 긴고자에몬노카미 도시히사(긴고 님)'를 모시는 신사가 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옛 사쓰마정 나카쓰가와 지구에 위치한 대석신사에서는 매년 9월 18일 전후의 추계 예대제(秋季例大祭) 때 '긴고 님 춤'(金吾様踊り|긴고 사마 오도리일본어)이 봉납되며, 제례 당일에는 많은 참배객으로 붐빈다.
대석신사(사쓰마정 나카쓰가와) - 옛 사쓰마 번 내에서는 그의 강직한 삶의 방식 때문에 많은 번사들의 숭배를 받았으며, 묘엔지 참배와 더불어 그가 묻힌 신가쿠지(心岳寺) 참배 또한 성행했다. 또한, 막부 말기 안세이 대옥으로 인해 긴코 만 해상으로 내몰린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신의 결의를 다지며 작은 배 위에서 동승했던 승려 겟쇼에게 도시히사의 고사를 이야기한 뒤, 신가쿠지 방향으로 합장하고 밤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4. 사후
도시히사는 다음과 같은 사세구(辞世の句)를 남겼다.
:晴蓑めが 玉のありかを 人問わば いざ白雲の 上と答へよ일본어
:(맑게 갠 날의 도롱이를 입은 이(나)의 혼이 있는 곳을 누가 묻거든, 자, 흰 구름 위라고 답하여라.)
형 시마즈 요시히사와 시마즈 요시히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와카(和歌)를 남겼다.
'''시마즈 요시히사'''
- 岩城まで 影ふきおける 寺に来て 雪の深さを 思ひこそやれ일본어[2] (이와키까지 그늘 드리운 절에 와서 보니 눈 덮인 깊은 산, 생각나는구나)
- なれし跡 のきばをたづね 来て見れば 露ならぬだに 袖ぞぬれける일본어[2] (익숙해진 흔적의 처마를 찾아와서 이슬은 아니지만 젖는 소매여)
- 絵に書きて とむる魂も かへらぬ道 はかなき橋の 夢かうつつか일본어[2] (그림에 담아두어도 혼은 돌아오지 않는 길, 덧없는 다리 꿈이여)
'''시마즈 요시히로'''
- 夕波に 月と雪とを 待ちみれば いづくにあるぞ 沖のたつ山일본어[2] (저녁 물결에 달과 눈을 기다리려 하니, 어디에 있으리 이 갯가의 산 절)
- 仏たのむ ゆえに袖ふる あられをば 御法(みのり)のはなと 捧げまつらむ일본어[2] (부처님을 의지하는 까닭에, 소매에 흩날리는 싸락눈을 공양으로 바치리)
도시히사가 사망하자 그를 따라 순사(殉死)한 가신(家臣)과 배신(陪臣)은 다음과 같다.
- 가마다 마사카네 (鎌田政金, 죄옥 좌위문)
- 키와키 스케사다 (木脇祐定)
- 키와키 스케하루 (木脇祐辰, 민부승)
- 토야 요시토키 (東郷甚右衛門尉)
- 혼다 시로자에몬 (本田四郎左衛門)
- 우와토코 신스케 (上床新助)
참조
[1]
웹사이트
島津歳久(読み)しまづ としひさ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島津歳久」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6
[2]
서적
島津歳久の自害(増補改訂版)
島津顕彰会
2000-10
[3]
문서
[4]
웹사이트
さつま人国誌「島津歳久、波乱の生涯・下」
http://373news.com/_[...]
[5]
웹사이트
さつま人国誌「島津歳久の最期」
http://373news.com/_[...]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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